끝, 새로운 시작 리뷰 — 대홍수 속 신생아를 안고 걸어야 했던 엄마의 이야기
"끝, 새로운 시작"(The End We Start From)은 2023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된 영국 서바이벌 드라마로, 한국에서는 2025년 3월에 개봉했습니다. 킬링 이브의 조디 코머가 주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제작과 출연을 겸했어요. 대홍수로 런던이 물에 잠긴 뒤,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도는 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로튼토마토 비평 89%의 호평에도 한국에서는 관객 4,884명으로 조용히 지나간, 숨은 작품이에요.
줄거리 — 세상이 끝난 날, 아이가 태어났다
끊임없는 폭우로 런던이 물에 잠깁니다. 바로 그 순간 주인공(조디 코머)은 진통을 겪고 있어요. 간신히 병원에 도착해 아들 젭을 낳지만, 집은 이미 물속입니다. 남편 R(조엘 프라이)과 함께 시부모(마크 스트롱, 니나 소산야) 집으로 피신하지만 거기도 안전하지 않아요.
상황이 악화되면서 부부는 떨어지게 되고, 이름 없는 '여자'는 홀로 갓난아기를 안고 영국 곳곳을 떠돕니다. 정부 대피소, 오크니 제도의 공동체 — 어디를 가든 안전은 일시적이고, 유일한 상수는 품에 안긴 아기뿐이에요. 특이한 건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름이 없다는 겁니다. 크레딧에도 '여자', 'R', 'O', 'AB'로만 표기돼요.
조디 코머, 얼굴 하나로 영화를 끌고 간다
이 영화의 핵심은 조디 코머입니다. 킬링 이브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와는 완전히 다른 — 취약하고, 지쳐있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소화했어요.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인데, 표정 하나 몸짓 하나로 관객이 알아야 할 모든 감정을 전달합니다. "커리어 최고의 연기"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닙니다.
할리우드 대작 재난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인상적이에요. CGI 물폭탄 대신, 물이 스며드는 집, 텅 빈 거리, 배급줄에 선 사람들의 표정으로 재앙을 보여줍니다. 촬영감독 수지 라벨이 담아낸 영국 시골 풍경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섬뜩해요 — 코로나 팬데믹 때 텅 빈 도시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앨리스 버치(노멀 피플)의 각본과 안나 메러디스의 일렉트로닉 스코어도 영화의 분위기를 잘 잡아요. 최소한의 대사, 최소한의 설명으로 "이 가까운 미래가 내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조용히 쌓아가는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아쉬운 점 — 조용함이 지루함으로 넘어가는 순간
"보는 맛은 있는데 남는 게 없다"는 반응이 이 영화의 약점을 정확히 짚습니다. 감정적으로 깊이 파고들어야 할 장면에서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져요. 엠파이어 리뷰의 표현을 빌리면, "뜨거워야 할 순간에 묘하게 차가운" 영화입니다.
주인공에 대해 "엄마"라는 것 이외에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것도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에요. 의도적으로 캐릭터 배경을 비워서 보편적 이야기로 만들려 한 건 이해하지만, 그만큼 감정 이입의 깊이가 제한됩니다. 재난의 원인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가 궁금한 관객에게는 답답할 수 있어요.
결말이 다소 깔끔하게 마무리된다는 점도 논란이에요. 영화 내내 쌓아온 절박함에 비해 끝이 너무 매끈해서, "이게 끝?"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저예산의 한계도 간간이 느껴지고요.
- 조디 코머의 압도적 연기 — 대사 없이 표정으로 전하는 감정
- 할리우드식 재난물과 완전히 다른 조용하고 내밀한 접근
- 코로나 시대를 겪은 우리에게 닿는 현실감
- 수지 라벨의 아름답고 섬뜩한 시네마토그래피
- 101분의 절제된 러닝타임, 군더더기 없는 구성
- 감정적으로 깊어져야 할 순간의 묘한 차가움
- 캐릭터 배경 부재 — "엄마" 외에 아는 게 없다
- 재난의 원인과 세계관에 대한 설명 부족
- 쌓아온 절박함 대비 너무 깔끔한 결말
- 저예산 한계가 간간이 드러남
비교 — 칠드런 오브 맨, 그리고 최근 재난 영화들
"칠드런 오브 맨"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어요. 아이가 희망의 상징이 되고, 황폐한 세계를 관통하는 로드무비라는 골격이 비슷하거든요. 하지만 "칠드런 오브 맨"이 정치적 시선으로 세상을 해부했다면, "끝, 새로운 시작"은 철저히 한 엄마의 시야에 머무릅니다. 더 좁고, 더 사적이고, 더 조용해요.
같은 해에 리뷰한 "We Bury the Dead"와도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재난 상황에서 스펙터클보다 개인의 슬픔과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둘 다 비평가에게는 호평받았지만 액션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지루하다"는 반응을 받았거든요. 장르의 간판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 드라마인 작품들이에요.
총평
한국에서 5천 명도 안 본 영화지만, 조디 코머의 연기만으로도 시간을 쓸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재난 스펙터클은 없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날 조용히 틀어놓으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분위기가 있어요. "엄마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시선이 필요한 분에게 추천합니다. 다만 "재난 영화"라는 기대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실망할 수 있으니, 이건 조용한 인간 드라마라는 걸 알고 보시길.
이 아이를 안고 한 걸음만 더
조디 코머의 연기가 궁금하다면 볼까,
스펙터클한 재난물을 원한다면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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