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리뷰 — 칸 황금종려상·아카데미 수상, 사랑의 가장 어두운 얼굴
어떤 영화는 사랑을 약속으로 그리고, 어떤 영화는 사랑을 설렘으로 그린다.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의 2012년작 아무르(Amour)는 사랑을 짐으로 그린다.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 합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까지 가져갔다. 하지만 어떤 상패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의 무게를 대신 설명해주지 못한다. 제목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 안에 담긴 것은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이다.
파리의 아파트, 두 사람만 남은 세계
영화는 결말을 먼저 보여준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침대에 고운 자태로 누운 노파의 시신이 있다. 그리고 장면은 몇 달 전으로 돌아간다. 제자의 피아노 연주회를 감상하고 나란히 걸어 귀가하는 조르주와 안느,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음악가 부부. 다음 날 아침 식사 중, 안느가 갑자기 반응을 멈춘다. 짧은 발작, 그리고 뇌졸중 진단. 수술은 실패하고 안느는 반신불수가 된다.
안느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다시는 병원에 보내지 말아줘." 조르주는 그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이후 영화는 철저하게 그 아파트 안에 머문다. 간병인이 드나들고, 딸이 찾아와 발을 동동 구르고, 조르주는 홀로 아내의 손발이 된다. 안느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카메라는 차갑고 정직하게 따라간다. 관객은 점점 이 아파트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 영화는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네케는 음악도 없고 컷도 아끼는 방식으로 일부러 관객의 눈물을 막는다. 대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묵직하고 오래가는 무언가다. 《히로시마 내 사랑》을 좋아했거나, 베르그만의 노년 영화들을 견뎌낸 경험이 있다면, 이 작품은 그 계보의 정점 중 하나다.
하네케가 처음으로 내린 무기
하네케는 그동안 폭력과 위선을 해부하는 도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퍼니 게임》의 냉소, 《캐쉬》의 불안, 《하얀 리본》의 서늘한 공포. 그의 카메라는 늘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아무르》에서 하네케는 처음으로 그 무기를 내려놓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기를 쥔 채로 전혀 다른 대상을 향한다. 이번에는 시스템도 제도도 위선도 공격하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두 주연의 연기는 이 영화의 결정적인 이유다. 트랭티냥은 격정 없이 헌신을 보여주고, 리바는 존엄이 무너지는 과정을 한 치의 가식 없이 전달한다. 하네케 본인이 각본을 구상할 때부터 트랭티냥만을 염두에 두었고, 14년간 영화를 떠나 연극무대에만 서던 그를 직접 설득했다. 이 두 배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아쉬운 점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진입 장벽에 대한 정직한 안내가 필요하다. 이 영화는 정서적으로 극단적으로 소모적이며, 하네케 특유의 냉정하고 거리 있는 연출은 일부 관객에게 감정 이입보다 단절감을 준다. 127분이라는 런닝타임 동안 거의 단일 공간에서만 전개되며 음악도 없다. 이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지만, 동시에 일반 극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고역이 될 수 있다. 재미 점수가 낮은 이유도 여기 있다. 이 영화는 '재미'를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무언가를 준다.
- 트랭티냥·리바의 연기 — 21세기 영화 연기의 정점 중 하나로 꼽히는 퍼포먼스
- 하네케의 도발이 처음으로 진심과 만난 순간 — 냉정함과 인간미의 공존
- 단일 공간·무음악·정적 카메라 — 형식 자체가 주제를 말한다
- 안락사·죽을 권리라는 묵직한 질문을 설교 없이 던지는 각본
- 칸 황금종려상·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 주요 영화제 최고상 독식
- 하네케 특유의 거리감 있는 연출 — 감정 이입보다 단절감을 느끼는 관객도 있음
- 음악 없음·단일 공간·느린 전개 — 일반 극영화 문법을 기대하면 고통스러울 수 있음
- 정서적 소모가 극단적 — 보고 나서 한동안 기력이 빠지는 영화
- 결말의 서사적 비약에 대한 해석 논란 (의도된 공백이나 당혹스러울 수 있음)
총평
재미 5.5는 혹평이 아니다. 이 영화는 재미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옳다. 하네케가 말했듯 이 영화의 주제는 노년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다. OST 항목이 낮은 건 이 영화에 사실상 음악이 없기 때문이다. 연주회 장면에서만 짧게 쓰이는 피아노 음악이 전부인데, 그 무음악이 이 영화의 침묵을 더 밀도 있게 만든다. 나머지 항목들이 최고점에 가까운 것은 이 영화가 그만한 성취를 이뤘기 때문이다.
하네케는 출구를 닫는 방식으로 사랑을 정의한다
영화의 서사 엔진은 '고립의 점진적 완성'이다. 처음에는 아파트 바깥이 존재한다. 연주회, 거리, 버스. 그러나 안느의 첫 번째 발작 이후 영화는 조금씩 바깥을 지운다. 간병인이 드나들다 쫓겨나고, 딸이 방문하지만 진짜 대화는 없으며, 이웃의 소리조차 점점 사라진다. 관객은 이 아파트에서 점점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하네케가 선택한 긴장의 원천이다. 스릴러의 긴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압박.
결말의 행위는 서사적으로 준비되어 있다. 조르주가 안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들, 비둘기를 잡아 외투 안에 넣는 행동, 꽃을 침대 위에 뿌리는 동작. 하네케는 이 행위를 설명하지 않고 준비한다. 관객은 이 결말이 범죄인지 사랑의 마지막 형태인지 물어야 한다. 영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채로 끝난다. 이것이 하네케가 각본을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자신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영화가 21세기 위대한 영화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기술적 완성도 때문만이 아니다. 보편적인 공포를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화, 간병, 존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나이와 문화를 가리지 않는다. 하네케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아파트 안에 가둬둔 채, 관객이 두 시간 동안 그 안에 함께 앉아 있도록 설계한다.
- 하네케, 베르그만, 브레송 같은 미니멀한 유럽 아트하우스에 익숙한 분
- 영화에서 위로보다 진실을 원하는 분
- 연기 그 자체를 보기 위해 영화를 보는 분
- 사랑과 죽음, 존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기꺼이 마주하고 싶은 분
- 부모·배우자 간병 경험이 있고 아직 그 무게가 무거운 분
- 서사적 재미와 기승전결을 기대하는 분
- 음악과 감정적 고양을 통해 영화를 즐기는 분
- 지금 당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 — 나중에 보기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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