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리뷰 — 박정민이 직접 쓴 랩이 영화를 살린다
쇼미더머니 6년 개근에 아직 무명인 래퍼. 고향엔 죽어가는 아버지와 지우고 싶었던 흑역사뿐. 이준익 감독의 변산은 얼핏 익숙한 귀향 성장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직접 쓴 랩 가사와 함께 뭔가를 건져 올리려는 영화다. 100만을 못 넘긴 흥행 실패작이지만, 묵혀두기엔 아까운 게 분명 있다.
박정민이 직접 쓴 가사를 직접 뱉는 장면들 — 그 순간만큼은 연기와 진심의 경계가 흐려진다.
도망쳐 온 서울에서, 어쩔 수 없이 내려간 변산
학수는 변산을 증오한다. 부잣집 하나 없는 폐항, 보여줄 거라곤 노을밖에 없는 고향. 어머니를 힘들게 한 건달 아버지와 거기서 보낸 가난한 어린 시절. 서울에서도 잘 풀리는 게 없지만 최소한 변산만 아니면 됐다. 그런데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 한 통이 온다.
억지로 내려간 고향에서 학수는 흑역사들과 하나하나 마주친다. 자신을 짝사랑했던 선미는 여전히 변산에 있고, 학창 시절 괴롭혔던 용대는 건달이 됐으며, 자기가 훔쳐간 시로 교생 시절을 보낸 원준은 지역 신문기자가 되어 나타난다. 발목을 잡는 건 아버지만이 아니다. 학수는 도망칠 방향을 잃는다.
영화는 이 구조 안에서 코미디와 감동을 번갈아 건드린다. 정색하고 보면 웃기고, 웃다 보면 묘하게 찡한 순간이 찾아오는 이준익식 온기가 있다. 완성도보다는 체온이 먼저 느껴지는 영화다.
랩이 이 영화의 언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신선한 선택은 랩을 내레이션의 도구로 쓴 것이다. 학수가 고향으로 차를 몰며 내뱉는 첫 랩부터, 마지막 쇼미더머니 무대에서 관객 앞에 서는 순간까지 — 그가 말로 하지 못하는 것들을 랩이 대신한다. 동주에서 윤동주의 시가 내레이션을 맡았던 것처럼, 이준익 감독은 이번엔 랩을 그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박정민이 직접 가사를 썼기 때문에, 이 선택은 꽤 설득력이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를 살리는 힘이다. 박정민은 밉상 캐릭터를 밀고 나가면서도 구멍을 만들어 두고, 김고은은 선미를 마냥 순하게 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활기 있는 순간들이다. 아쉬운 건 그 다음부터다.
아버지 화해가 설득되지 않는다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아버지와의 화해다. 그런데 이 지점이 가장 약하다. 아버지는 가족을 방치한 명백한 가해자인데, 영화는 그를 무조건 용서받아야 할 존재로 처리하는 방향으로 성큼 가버린다. 학수의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는 충분히 쌓았지만, 그 분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누그러지는지는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 무대에서의 랩 가사가 그 감정의 해소를 담아야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는 관객에게 스스로 채우라고 비워두는 느낌이다.
전체 구조도 산만한 편이다. 학수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 — 선미, 미경, 용대, 원준 — 이 각자의 에피소드를 펼치는데, 유쾌하긴 해도 영화의 중심을 분산시킨다. 이준익 감독의 이전 음악 영화들인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이 인물들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엮었던 것에 비하면 느슨하다.
- 박정민의 연기 — 밉상과 공감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주연
- 랩을 내레이션 도구로 쓴 발상 — 직접 작사한 가사라 진정성이 살아있음
- 이준익 특유의 온기 있는 코미디 — 유치해도 순수하게 웃긴 장면들
- 변산 일대 노을 풍경 — 고향이 왜 떠나기 싫은 곳인지를 화면으로 설득
- 아버지와의 화해 — 설득 과정 없이 결론으로 직행하는 느낌
-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중심 서사를 분산시킴
- 감독의 기성 세대 시선이 청춘 서사 위에 얹혀 이질감을 만드는 구간 존재
- 마지막 무대 장면의 감정적 폭발력이 기대보다 약함
흠을 알면서도 변산 노을 장면에서는 잠깐 멈추게 된다.
박정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록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려면 이야기보다 박정민을 보는 쪽으로 마음을 틀어두는 게 낫다. 시나리오의 빈틈을 그가 상당 부분 메운다. 직접 쓴 가사, 직접 부른 랩, 그리고 그 배우가 만들어낸 학수라는 인물 — 이것이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의 대부분이다.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흥행 실패작으로 분류되지만, 박정민 팬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정민을 만든 과정이 여기 담겨 있다.
-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거나 궁금한 분
- 이준익 감독의 온기 있는 코미디 드라마에 익숙한 분
- 힙합·래퍼 문화를 소재로 한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
- 고향 귀향 성장물 — 결말보다 과정을 즐기는 분
- 서사의 설득력을 중요하게 보는 분
- 아버지-자식 화해 서사에 이미 피로감을 느끼는 분
- 이준익 대표작(사도, 동주, 왕의 남자)의 밀도를 기대한다면
- 산만한 조연 에피소드를 잘 못 견디는 분
학수는 결국 마이크 앞에 선다. 도망치지 않고. 그걸로 충분한 사람이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당신은 고향을 떠올릴 때 어떤 감정이 먼저 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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