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아브르 리뷰 - 세계에서 가장 따뜻한 이민자 영화

핀란드 감독이 프랑스어로 찍고, 이민자 소년을 주인공 삼고, 비극적인 소재를 동화처럼 풀어낸다. 르 아브르는 이 역설적인 조합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90분 동안 보여주는 영화다. 로튼토마토 99%, 칸 국제비평가협회상 — 숫자가 보증하지만, 이 영화를 진짜로 설명하는 건 숫자가 아니다.

FINLAND / FRANCE
LE HAVRE
르 아브르
2011 · 코미디 드라마 · 90분
Director
아키 카우리스마키
Screenplay
아키 카우리스마키
개봉
2011. 12. 08 (국내)
등급
전체 관람가
제작
Sputnik (핀란드·프랑스·독일 합작)
국내 관객
10,560명
Where to Watch MUBI
External
RT 99%
Metacritic 82
IMDb 7.2
씨네21 전문가 7.0
씨네21 관객 8.5
연기
1
마르셀 막스 앙드레 윌름스
한때 보헤미안이었으나 이제 항구도시 르 아브르의 구두닦이로 살아가는 노인. 외상 바게트, 단골 바, 아내 아를레티 — 가진 건 없지만 잃을 것도 없다는 듯 움직이는 이 영화의 중심.
2
아를레티 카티 오우티넨
마르셀의 아내.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칸 여우주연상을 받은 카우리스마키의 페르소나. 이 영화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역할을 맡는다.
3
모네 경감 장피에르 다루생
이드리사를 쫓는 경찰. 악인이 아니다 —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규칙을 따르지만 인간을 보는 사람.
4
이드리사 블로딘 미구엘
컨테이너에서 탈출한 아프리카 출신 불법 이민자 소년. 런던의 할머니에게 가려 한다. 말이 없고 눈이 크다.

카티 오우티넨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믿고 보는 영화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이 배우가 나올 때, 뭔가 단단하고 슬프고 따뜻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관객은 안다.

르 아브르 줄거리 — 구두닦이 마르셀, 소년을 만나다

프랑스 북서부 항구도시 르 아브르. 마르셀 막스(앙드레 윌름스)는 젊은 시절 보헤미안이자 작가를 꿈꿨으나 지금은 기차역에서 구두를 닦는다. 빵집에서 외상을 달고, 단골 바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아내 아를레티(카티 오우티넨)와 개 라이카와 함께 가난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일상을 산다.

어느 날 항구 컨테이너에서 아프리카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발견된다. 소년 이드리사만이 경찰의 눈을 피해 달아나고, 마르셀은 그를 숨겨주기로 한다. 마침 아내는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고, 마을 경감 모네는 소년을 쫓는다. 마르셀에게는 시간이 없다 — 이드리사가 영국 런던의 할머니에게 닿기 전에 3,000유로를 구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지 따지면 진다. 르 아브르는 처음부터 동화다. 가난한 이웃들이 돈을 모으고, 뜻밖의 인물이 열쇠를 쥐고, 나쁜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의 논지다.

르 아브르가 잘한 것 — 슬픔을 따뜻하게, 현실을 동화로 만드는 솜씨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배우들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조명은 어딘가 1950년대 프랑스 누아르를 연상시키는 앰버 계열로 물든다. 그런데 이 정적인 화면이 이상하게도 따뜻하다. 마르셀이 술집 주인에게 외상을 부탁하는 장면, 이웃이 아무 말 없이 식료품을 내밀고 가는 장면 — 대사가 없는 자리에서 연대가 느껴진다. 이게 이 감독이 수십 년간 갈고닦은 기술이다.

90분이라는 러닝타임도 미덕이다. 이 이야기에 필요한 것만 담고,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아를레티의 병이 무엇인지, 이드리사의 런던에서의 삶이 어떨지, 경감 모네가 왜 그 선택을 하는지 —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OST도 눈에 띈다. 락어빌리와 샹송이 뒤섞인 사운드트랙이 이 영화의 시간감각 — 현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반세기 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 을 정확하게 받쳐준다.

다만 이 완벽한 따뜻함이 동시에 이 영화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다음 섹션에서.

아쉬운 점 — 르 아브르가 선택한 낙관의 대가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외면한다. 컨테이너에 일주일을 갇혀 있던 난민들이 멀쩡하고, 지역 공동체 전체가 소년을 위해 단결하고, 기적은 두 번 일어난다. RT 99%를 기록했지만 일부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도 이 지점이다 — 이 영화는 이민자 현실을 다루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카우리스마키가 세상이 어땠으면 하는지를 그리는 판타지라고. 그 비판은 틀리지 않다. 이 영화를 보며 유럽 이민 위기의 실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카우리스마키 입문자라면 이 영화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 — 무표정, 무감정, 최소한의 리액션 — 이 처음에 낯설 수 있다. 코미디라고 소개받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반응도 이 스타일 때문이다. 유머가 없는 게 아니라, 유머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이걸 받아들이는 데 10~20분이 필요한 영화다.

장점
  •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미니멀 미장센 — 정지된 듯한 화면이 역설적으로 따뜻하다
  • 무표정·무감동 연기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인간애
  • 90분 안에 필요한 것만 담은 단단한 편집
  • 락어빌리·샹송·앰버 조명이 만드는 독특한 시간감각 — 과거인지 현재인지 모를 세계
  • 악당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따뜻한 결말
아쉬운 점
  • 이민자 현실을 의도적으로 미화 — 사회 비판보다 이상주의에 가깝다
  • 무표정·무리액션 연기 스타일이 입문자에게는 장벽이 될 수 있다
  • 동화적 낙관주의가 지나치게 선명해 긴장감이 희박하다
  • 카우리스마키 팬에게는 새로운 것이 없다 — "교과서적 카우리스마키"라는 평도 있다

단점을 적으면서 이 영화가 덜 좋아지지는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 그것도 영화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르 아브르 총평 — 90분짜리 기도

종합 평점
르 아브르
4.3
/ 5.0
감동
4.3
스토리
4.0
연기
4.3
영상미
4.5
OST
4.3
몰입도
4.0 초반 적응 필요

이 영화는 세상이 이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보여준다. 그게 나약함이 아니라 의지다. 카우리스마키는 현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처방을 쓰고 있다. 마르셀의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건, 그것이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 보고 나서 잠깐 멍했다. 슬프지 않은데 슬프고, 무겁지 않은데 뭔가 가슴에 남는 영화. 한참 뒤에 그 이유를 알았다 — 이 영화는 바라는 세상의 모양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Analysis -- 장르의 문법

카우리스마키는 사회비판 영화 장르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기도를 놓는다

이민자 소재 영화는 하나의 공식을 갖는다 — 현실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시스템의 무감각을 폭로하고, 비극으로 끝마치거나 작은 승리로 여운을 남긴다. 다르덴 형제의 세계가 그렇고, 켄 로치의 세계가 그렇다. 르 아브르는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 이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영화에는 악인이 없고, 기적이 두 번 일어나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선택이 단순히 감상적인 게 아니다.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될 수 있다"가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장르의 껍질을 빌려 발화하고 있다. 모네 경감이 결정적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하는 장면 — 거기서 이 영화의 의도가 드러난다. 카우리스마키는 인간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르 아브르는 사회비판 영화가 아니라 사회적 기도가 된다. 장르의 문법을 따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 문법이 전제하는 비관주의를 뒤집는다. 이게 카우리스마키 팬들이 "가장 햇살 가득한 작품"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자, 비평가들이 "판타지"라고 냉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맞느냐는 결국 관객 각자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이 작품, 나한테 맞을까?
O  이런 분께 추천
  • 느리고 조용하고 단단한 영화를 원하는 분
  • 짐 자무쉬, 벤더스,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는 분
  • 카우리스마키 입문을 찾고 있는 분 (가장 따뜻한 입문점)
  • 현실이 지쳐서 잠깐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분
X  이런 분은 패스
  • 빠른 전개와 감정 폭발이 있는 드라마를 원하는 분
  • 이민 문제의 현실적 묘사를 기대하는 분
  • 무표정한 연기 스타일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분
  •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필요한 분
"
세상이 이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의 용기다.
느리고 따뜻한 영화를 찾는 모든 분께
#카우리스마키 #미니멀리즘 #동화같은현실 #항구도시

다 보고 나서 마르셀의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동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카우리스마키 영화 중 처음 본 작품이 무엇이었나요? 아니면 아직 본 적 없다면, 이 영화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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