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후기 — 빔 벤더스가 춤으로 되살린 예술혼

피나 포스터

20년간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약속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카메라를 들었고, 한 명은 춤을 췄다. 촬영을 며칠 앞둔 2009년 6월, 춤을 추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카메라를 내려놓으려 했지만, 떠난 이의 무용수들이 말했다. 춤추게 해달라고.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빔 벤더스의 <피나>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피나 바우쉬를 '위한' 다큐멘터리이며, 동시에 하나의 질문이다 -- 예술가가 사라진 뒤에도 예술은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독일 3D 다큐멘터리
PINA
피나
Pina · 2011
재관람 권장
장르
다큐멘터리 · 무용 · 예술
개봉
2011 · 한국 2012.08.30
러닝타임
104분
원작
피나 바우쉬 안무 작품
출연
탄츠테아터 부퍼탈 앙상블
감독
빔 벤더스
국내 시청 왓챠 Apple TV 대여 Google Play 대여
외부 평점
IMDb 7.6
RT 95%
Metacritic 83
Daum 8.1
수록 작품
1
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 · 1975
스트라빈스키의 원곡 위에 흙으로 뒤덮인 무대. 원시적 에너지와 집단의 폭력성이 군무로 폭발한다. 피나 바우쉬가 탄츠테아터의 방향을 선언한 초기 대표작.
2
카페 뮐러 Cafe Muller · 1978
빈 의자와 테이블이 어지럽게 놓인 카페에서 눈을 감은 채 헤매는 인물들. 접촉과 단절, 갈망과 거절이 반복되는 피나 바우쉬의 가장 사적인 작품.
3
콘탁트호프 Kontakthof · 1978
남녀가 만나는 접촉의 장. 호기심과 욕망, 수치심과 잔인함이 유머와 뒤섞인다. 인간관계의 서투름을 날것 그대로 무대에 올린 작품.
4
보름달 Vollmond · 2006
거대한 바위와 실제 물이 쏟아지는 무대. 폭풍우 속에서 두려움과 갈망 사이를 오가는 격렬한 춤. 피나 바우쉬 후기의 스펙터클한 걸작.

네 작품 모두 처음 접했지만, 카페 뮐러의 첫 장면에서 숨이 멎었다. 눈을 감고 벽을 더듬는 그 몸짓이, 설명 없이도 외로움 그 자체였다.

20년의 약속, 그리고 부재가 완성한 영화

1985년, 빔 벤더스는 당시 동료 배우 솔베이그 도마르틴에게 이끌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 공연을 보러 간다. 원래 춤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공연이 끝났을 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20여 년, 벤더스는 피나 바우쉬의 예술을 영화로 담겠다는 꿈을 품지만, 무대 위 신체의 입체감과 에너지를 2D 화면에 가둘 수 없다는 판단에 계속 미룬다. 3D 기술이 성숙한 2009년, 마침내 촬영을 결심하고 피나와 함께 수록 작품을 선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촬영 개시 며칠 전, 피나 바우쉬가 암 진단을 받고 불과 5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프로젝트는 즉각 중단됐다. 하지만 피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단원들이 벤더스를 찾아와 설득한다. 춤을 추는 것이 피나를 기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주인공의 부재가 오히려 영화의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

<피나>에는 피나 바우쉬의 생전 인터뷰나 전기적 서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단원들이 그녀의 안무를 춤추고, 짧은 독백으로 스승을 회상하며, 부퍼탈 거리 위에서 각자의 춤을 바친다. 이 구조는 통상적인 전기 다큐멘터리와 완전히 다르다. 피나를 '설명'하는 대신 피나가 남긴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 말이 아닌 몸으로 추모하는 영화다.

피나 다큐멘터리 속 장면

움직임이 언어를 대신할 때

이 영화의 진짜 주어는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그녀가 창시한 탄츠테아터(Tanztheater)라는 예술 형식 자체다. 탄츠테아터는 독일어로 '춤(Tanz)'과 '연극(Theater)'의 합성어로, 피나 바우쉬가 1973년 부퍼탈 시립극장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확립한 장르다. 고전 발레의 아름다운 형식미를 벗어던지고, 무용수가 노래하고 대사를 내뱉고 관객을 직접 바라보며 일상의 몸짓을 무대 위에 올린다. 피나의 무대에서는 흙과 물, 꽃과 바위가 추상적 오브제를 대신하고, 무용수들의 관계는 대부분 실패하거나 어긋난다.

중요한 배경이 있다. 피나 바우쉬의 스승 쿠르트 요스는 '탄츠테아터'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루돌프 폰 라반의 제자였고, 요스 자신도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거목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 속에서 태어난 독일 표현주의는 인간 내면의 공포와 불안을 형식의 파괴를 통해 드러내려 했다. 피나 바우쉬는 이 유산 위에 서 있되, 한 가지를 더했다. '질문하기'라는 방법론이다. 그녀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건네는 대신 단원들에게 수십 개의 질문을 던졌고, 무용수들은 각자의 기억과 감정으로 답했으며, 그 응답이 곧 안무가 됐다.

<피나>는 이 과정의 결과물을 관객에게 직접 체감시킨다. 봄의 제전에서 흙바닥을 맨발로 구르는 군무의 원시적 에너지, 카페 뮐러에서 반복적으로 포옹했다가 밀어내는 두 몸의 절박함, 보름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춤추는 격정 -- 이 모든 것이 설명 없이 관객의 감각으로 흘러들어온다. 빔 벤더스의 3D 카메라는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관객을 객석이 아니라 무대 위, 무용수들 사이로 데려가는 것이다. 근육의 떨림, 땀의 궤적, 숨소리의 진동이 스크린을 넘어 물리적으로 다가온다.

다만 이 몰입의 강도가 곧 진입 장벽이기도 하다. 서사적 내레이션이 부재하고, 네 편의 공연이 교차 편집되는 구조는 현대무용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때로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피나 다큐멘터리 속 장면

남겨진 것들의 한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동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가장 큰 것은 피나 바우쉬 본인의 목소리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타계라는 불가항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벤더스는 그 부재를 단원들의 증언과 아카이브 영상으로 채우려 했다. 하지만 단원들의 인터뷰는 립싱크 없이 보이스오버로 처리되어, 그들의 감정이 때로 추상적으로 흘러간다.

네 편의 대표작이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도 양날의 검이다. 각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지만, 개별 작품의 전체 맥락이나 창작 배경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피나 바우쉬의 예술 세계에 이미 익숙한 관객에게는 아름다운 컬렉션이지만,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각 작품이 왜 중요한지를 스스로 읽어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빔 벤더스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설명하지 않는' 미학이 때로는 불친절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
Good
  • 3D를 기술이 아닌 예술적 언어로 활용한 거의 유일한 영화. 무대의 공간감과 신체의 입체감이 스크린을 넘어 전달된다.
  • 봄의 제전, 카페 뮐러 등 4편의 대표작을 최정상 수준으로 촬영한 무용 아카이브로서의 가치.
  • 피나를 설명하지 않고 피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구조적 선택. 추모의 형식 자체가 피나의 철학과 일치한다.
  • 부퍼탈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야외 퍼포먼스가 무대와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탄츠테아터의 정신을 체현한다.
-
Bad
  • 피나 바우쉬 본인의 육성과 영상이 극소량. 인물에 대한 전기적 깊이는 외부 자료에 의존해야 한다.
  • 단원 인터뷰의 보이스오버 처리가 감정의 직접성을 약화시키는 구간이 있다.
  • 네 작품 교차 편집으로 인해 개별 작품의 창작 맥락이나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 현대무용 비경험자에게는 서사 부재 자체가 상당한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단점들을 알면서도, 영화가 끝난 뒤 카페 뮐러의 그 포옹 장면을 며칠째 떠올렸다. 이해하지 못해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피나 다큐멘터리 속 장면

죽음 이후에도 춤은 계속된다

<피나>는 단순한 예술가 헌정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묻는 것은 '안무가가 떠난 뒤에도 안무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영화 자체가 그 답이다.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무용수들이 스승의 안무를 재현하는 것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피나가 그들 각자에게 심어둔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응답이다. 그것이 피나의 방법론이었기 때문이다. 피나는 완성된 형태를 건네지 않았고, 빈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떠난 뒤에도 그 공간은 닫히지 않는다.

빔 벤더스는 이 영화에서 친구이자 예술적 경외의 대상이었던 사람을 잃은 슬픔과, 그럼에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사이에서 최선의 균형을 찾았다. 화려한 3D 기술을 쓰면서도 결코 기술을 과시하지 않고, 카메라를 무용수에게 바짝 들이밀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절제된 시선이야말로 벤더스가 피나에게 바치는 가장 큰 경의다.

My Rating
피나
4.1
/ 5.0
인상
4.0 탄츠테아터
스토리
3.5 비서사 구조
연기
4.5
영상미
5.0
OST
4.0
몰입도
3.5

점수로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좋은 작품'이기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감각이었다.

문화 · 사회 Analysis

안무는 소멸하는 예술인가 -- 피나가 남긴 '질문하기'의 유산

안무(choreography)는 본질적으로 소멸하는 예술이다. 악보가 음악을 보존하고 캔버스가 회화를 남기듯, 안무에도 라바노테이션 같은 기보법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동작의 설계도일 뿐 춤의 생명은 담지 못한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 위의 에너지는 사라지고, 안무가가 세상을 떠나면 그 춤의 가장 깊은 의도까지 함께 소실된다. 마사 그레이엄, 머스 커닝햄 등 거장 안무가 사후 무용단의 존폐가 늘 화두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피나 바우쉬의 경우는 독특하다. 그녀의 창작 방법론이 이 소멸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나는 완성된 안무를 전달하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너를 움직이게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졌고, 무용수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끌어낸 응답이 동작이 되고 장면이 됐다. 이 방식에서는 안무의 소유권이 안무가에게만 귀속되지 않는다.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버전의 진실을 품고 있으며, 피나가 떠난 뒤에도 그 진실은 몸속에 남아 있다.

영화 <피나>는 이 구조를 정확히 포착한다. 단원들이 스승의 작품을 재현할 때, 그것은 박물관의 복원이 아니라 각자의 몸에 남아 있는 피나의 질문에 다시 한번 응답하는 행위다. 빔 벤더스의 카메라는 그 응답의 순간을 3D로 기록함으로써 -- 소멸하는 예술에 물질적 지속성을 부여하는 또 하나의 시도를 감행한다. 피나의 방법론은 안무가의 죽음 이후에도 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고, 벤더스의 영화는 그 모델의 유효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 작품, 나한테 맞을까?
O  이런 분께 추천
  • 현대무용이나 공연예술에 관심이 있거나,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지만 열린 마음이 있는 분
  • 서사 없이 감각과 감정만으로 전달되는 예술을 즐기는 분
  • 3D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호기심이 있는 분
  • 예술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중 전기적 설명보다 작품 자체로 말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분
X  이런 분은 패스
  • 명확한 스토리라인과 기승전결이 있는 다큐멘터리를 기대하는 분
  • 인물의 생애와 일화를 중심으로 한 전기 다큐멘터리를 원하는 분
  • 현대무용의 추상성에 거부감이 있거나, 춤 자체에 관심이 없는 분
  • 104분 동안 대사와 내레이션 없이 공연 영상을 감상하는 것이 어려운 분
"
떠난 사람을 추모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그 사람이 남긴 질문에 계속 답하는 것이다
춤이라는 소멸하는 예술이 죽음을 넘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분에게
피나 바우쉬 탄츠테아터 3D 다큐멘터리 빔 벤더스

피나 바우쉬는 말했다. "춤춰라, 춤춰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이 영화는 그 말이 유언이 된 뒤에도, 춤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지만 몸이 기억하는 어떤 순간이 있나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언내추럴 후기 —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파헤치는 법의학 드라마

탑건: 매버릭 후기 —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극장 경험은 죽지 않는다'는 한 배우의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물

디 그레이맨 후기 — 2000년대 다크 판타지 원조의 빛과 그림자

디 그레이맨 할로우 후기 — 원작의 정수를 담은 그릇이 너무 작았다

MIU404 후기 — 24시간 안에 진실을 쫓는 버디 수사극의 정석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후기 — 샐리 필드와 문어의 감동 드라마

미안해요 리키 후기 후기 — 택배 한 상자에 담긴 노동자의 존엄

라스트 마일 후기 —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스릴러

탑건 후기 — 영화가 만든 영원한 순간들이 다시 한번, 40주년 재개봉 소식

주술회전 리뷰 — MAPPA가 소년 점프를 완전히 다시 썼다, 시즌1·2 + 극장판 총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