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후기 — 942만이 선택한 한국형 재난 코미디
특수 요원도, 전직 군인도 아니다. 백수와 연회장 부지점장이다. 이 두 사람이 유독가스에 뒤덮인 서울 한복판 빌딩 외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른다. 942만 명이 납득했다.
조정석과 임윤아의 케미는 로맨스보다 전우애에 가깝다. 고백 거절 서사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감동으로 소비하지 않고 속도전의 연료로만 쓴다. 둘 다 뛰는 게 더 어울린다.
칠순 잔치 날 탈출 게임이 시작됐다
용남은 오늘도 백수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 온 가족이 모인 연회장에서 눈칫밥을 먹던 중, 동아리 후배 의주가 이곳 부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어색한 재회가 채 마무리되기 전, 인근 화학 공장에서 테러리스트가 유독가스를 방류한다. 순식간에 가스가 도심을 덮고, 낮은 곳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 살아남으려면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영화가 설정하는 유일한 규칙은 단순하다. 가스는 아래서 위로 오른다, 둘은 클라이머다, 그리고 주변에는 한국의 흔한 빌딩 외벽과 네온사인과 현수막과 에어컨 실외기가 있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영화는 일상의 풍경을 탈출 도구로 바꿔나간다. 특수 장비 없이, 슈퍼히어로 없이, 있는 것으로 버텨내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전반 15분이 느리다는 반응이 있는데, 그 15분이 용남을 '루저'로 확실히 각인시키는 시간이다. 그 각인이 없으면 이후 탈출 장면들이 주는 쾌감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참고 넘기면 103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소시민이 영웅이 되는 방식
한국 재난 영화가 놓치기 쉬운 지점을 이 영화는 잘 짚었다. 재난의 스펙터클보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집중한다는 것. 용남과 의주는 계속 틀리고, 막히고, 다시 계산한다. 영리하게 설계된 주인공이 아니라 막다른 상황에서 일단 해보는 사람들이다. 그 아마추어적 감각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끌어낸다. 빌딩 외벽에 매달려 흔들리는 장면들은 스턴트의 느낌보다 공포의 느낌이 먼저 오는데, 대역 없이 직접 찍었다는 사실이 그 실재감을 만든다.
조정석은 이 영화에서 코미디 배우로서의 타이밍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허탈한 유머, 절박함과 능청이 겹치는 순간들이 영화의 리듬을 살린다. 임윤아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연기 깊이보다 신체적 밀도와 눈빛의 집중력으로 장면을 채웠고, 첫 주연치고 꽤 안정적이다. 다만 영화가 두 사람 외 인물들에게 주는 몫은 얕다. 대가족 코미디 유니버스가 배경으로만 소비되고, 고두심을 비롯한 조연들은 리액션 이상을 요구받지 못한다.
신파 없이 달린다는 것의 가치
2019년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중 이 영화가 942만을 모은 이유 중 하나는 신파의 부재다. 억지 눈물이 없고, 죽어야 할 사람을 일부러 죽이지 않으며, 감동을 강요하는 음악이 없다. 103분 내내 탈출이라는 목표 하나로 달린다. 씨네21 전문가 평점이 7점대인 건 서사 밀도와 인물 깊이에서의 아쉬움 때문이겠지만, 여름 블록버스터로서 이 영화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오히려 욕심 없이 한 가지를 잘 한 영화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 특수 장비 없이 일상 소품으로 탈출하는 아이디어 — 한국 도시 풍경을 액션 무대로 바꾸는 연출의 발상이 신선하다
- 조정석의 코미디 타이밍 + 임윤아의 신체 밀도 — 두 배우가 대역 없이 소화한 액션이 실재감을 만든다
- 신파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구성 — 억지 눈물 없이 103분을 속도감 있게 달린다
- 루저 주인공 설정이 탈출 쾌감을 증폭시킨다 — 전반의 긴 도입부가 후반 카타르시스의 연료가 된다
- 고두심·박인환을 비롯한 조연들이 리액션 이상의 역할을 갖지 못한다 — 대가족 유니버스가 배경으로만 소비된다
- 재난의 원인(테러리스트 동기)이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 설정의 얕음이 몰입을 끊는 구간이 있다
- 용남-의주의 로맨스 서브플롯이 미완인 채로 끝난다 — 충분히 발전시키거나 아예 없애는 쪽이 더 깔끔했을 것
- 클라이밍 장면이 반복되며 중반 이후 긴장의 밀도가 조금씩 떨어진다
이 영화의 단점들은 대부분 더 욕심 냈다면 생겼을 문제들이기도 하다. 욕심을 자른 덕분에 오히려 달린다.
여름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상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액션 시퀀스의 공간 설계, 코미디와 긴장감의 호흡 배분, 배우들의 신체 연기를 담는 카메라까지 첫 장편치고 완성도가 안정적이다. 류승완이 조연출로 키운 감독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다. 깊이 있는 인물 드라마나 메시지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여름 저녁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면, 이만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스토리 3.5와 재미 4.5의 격차가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잘 쓴 이야기가 아니라 잘 달리는 영화다.
- 신파 없이 속도감 있게 달리는 여름 블록버스터를 찾는 분
- 조정석의 코미디 연기를 좋아하고 그의 액션 버전이 궁금한 분
- 슈퍼히어로가 아닌 소시민이 주인공인 재난 영화가 더 공감되는 분
- 임윤아의 연기 변신이 궁금한 분 — 예상보다 훨씬 잘한다
- 재난 영화에서 설정의 개연성과 서사 밀도를 우선시하는 분
-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 — 빌딩 외벽 클라이밍 장면이 상당히 많다
- 인물 관계의 서브플롯이 제대로 마무리되기를 원하는 분
- 조연 캐릭터들도 충분히 살아 있는 앙상블 영화를 기대하는 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라이밍이 아니다. 용남이 의주에게 "야, 너 괜찮냐"고 묻는 그 짧은 순간이다. 103분을 달려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거기 있다.
재난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스펙터클이었나요 아니면 사람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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