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후기 — 942만이 선택한 한국형 재난 코미디

엑시트 포스터

특수 요원도, 전직 군인도 아니다. 백수와 연회장 부지점장이다. 이 두 사람이 유독가스에 뒤덮인 서울 한복판 빌딩 외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른다. 942만 명이 납득했다.

한국 영화
EXIT
엑시트
엑시트 · 2019
감독 장편 데뷔작
장르
재난 · 코미디 · 액션
개봉
2019년 7월 · 극장 개봉
러닝타임
103분
원작
오리지널 시나리오
주연
조정석 · 임윤아
감독
이상근
국내 시청 넷플릭스 웨이브
외부 평점
IMDb 7.0
RT 83%
네이버 관객 8.99
연기
1
용남 조정석
대학 산악 동아리 에이스 출신, 현재는 다년째 취업 실패 중인 청년 백수. 어머니 칠순 잔치에서 가족들의 눈칫밥을 먹다가 갑작스러운 재난 앞에서 묵혀뒀던 클라이밍 실력을 꺼내든다. 조정석 특유의 허당 코미디와 위기 돌파 에너지가 폭발하는 역할.
2
의주 임윤아
용남의 대학 동아리 후배, 현재 연회장 부지점장. 용남의 고백을 거절한 전력이 있지만 재난 앞에서 그보다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다. 임윤아 첫 영화 주연작으로, 액션 장면의 80%를 대역 없이 소화한 체력과 집중력이 인상적이다.
3
현옥 고두심
오늘의 주인공, 용남의 어머니. 칠순 잔치 당일 재난을 맞닥뜨리는 대가족 유니버스의 중심. 고두심 특유의 묵직하고 따뜻한 존재감이 코미디 속 감정의 무게를 잡아준다.

조정석과 임윤아의 케미는 로맨스보다 전우애에 가깝다. 고백 거절 서사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감동으로 소비하지 않고 속도전의 연료로만 쓴다. 둘 다 뛰는 게 더 어울린다.

칠순 잔치 날 탈출 게임이 시작됐다

용남은 오늘도 백수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 온 가족이 모인 연회장에서 눈칫밥을 먹던 중, 동아리 후배 의주가 이곳 부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어색한 재회가 채 마무리되기 전, 인근 화학 공장에서 테러리스트가 유독가스를 방류한다. 순식간에 가스가 도심을 덮고, 낮은 곳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 살아남으려면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영화가 설정하는 유일한 규칙은 단순하다. 가스는 아래서 위로 오른다, 둘은 클라이머다, 그리고 주변에는 한국의 흔한 빌딩 외벽과 네온사인과 현수막과 에어컨 실외기가 있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영화는 일상의 풍경을 탈출 도구로 바꿔나간다. 특수 장비 없이, 슈퍼히어로 없이, 있는 것으로 버텨내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전반 15분이 느리다는 반응이 있는데, 그 15분이 용남을 '루저'로 확실히 각인시키는 시간이다. 그 각인이 없으면 이후 탈출 장면들이 주는 쾌감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참고 넘기면 103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엑시트 포스터2

소시민이 영웅이 되는 방식

한국 재난 영화가 놓치기 쉬운 지점을 이 영화는 잘 짚었다. 재난의 스펙터클보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집중한다는 것. 용남과 의주는 계속 틀리고, 막히고, 다시 계산한다. 영리하게 설계된 주인공이 아니라 막다른 상황에서 일단 해보는 사람들이다. 그 아마추어적 감각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끌어낸다. 빌딩 외벽에 매달려 흔들리는 장면들은 스턴트의 느낌보다 공포의 느낌이 먼저 오는데, 대역 없이 직접 찍었다는 사실이 그 실재감을 만든다.

조정석은 이 영화에서 코미디 배우로서의 타이밍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허탈한 유머, 절박함과 능청이 겹치는 순간들이 영화의 리듬을 살린다. 임윤아도 예상을 뛰어넘는다. 연기 깊이보다 신체적 밀도와 눈빛의 집중력으로 장면을 채웠고, 첫 주연치고 꽤 안정적이다. 다만 영화가 두 사람 외 인물들에게 주는 몫은 얕다. 대가족 코미디 유니버스가 배경으로만 소비되고, 고두심을 비롯한 조연들은 리액션 이상을 요구받지 못한다.

엑시트 포스터3

신파 없이 달린다는 것의 가치

2019년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중 이 영화가 942만을 모은 이유 중 하나는 신파의 부재다. 억지 눈물이 없고, 죽어야 할 사람을 일부러 죽이지 않으며, 감동을 강요하는 음악이 없다. 103분 내내 탈출이라는 목표 하나로 달린다. 씨네21 전문가 평점이 7점대인 건 서사 밀도와 인물 깊이에서의 아쉬움 때문이겠지만, 여름 블록버스터로서 이 영화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오히려 욕심 없이 한 가지를 잘 한 영화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
Good
  • 특수 장비 없이 일상 소품으로 탈출하는 아이디어 — 한국 도시 풍경을 액션 무대로 바꾸는 연출의 발상이 신선하다
  • 조정석의 코미디 타이밍 + 임윤아의 신체 밀도 — 두 배우가 대역 없이 소화한 액션이 실재감을 만든다
  • 신파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구성 — 억지 눈물 없이 103분을 속도감 있게 달린다
  • 루저 주인공 설정이 탈출 쾌감을 증폭시킨다 — 전반의 긴 도입부가 후반 카타르시스의 연료가 된다
-
Bad
  • 고두심·박인환을 비롯한 조연들이 리액션 이상의 역할을 갖지 못한다 — 대가족 유니버스가 배경으로만 소비된다
  • 재난의 원인(테러리스트 동기)이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 설정의 얕음이 몰입을 끊는 구간이 있다
  • 용남-의주의 로맨스 서브플롯이 미완인 채로 끝난다 — 충분히 발전시키거나 아예 없애는 쪽이 더 깔끔했을 것
  • 클라이밍 장면이 반복되며 중반 이후 긴장의 밀도가 조금씩 떨어진다

이 영화의 단점들은 대부분 더 욕심 냈다면 생겼을 문제들이기도 하다. 욕심을 자른 덕분에 오히려 달린다.

여름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상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액션 시퀀스의 공간 설계, 코미디와 긴장감의 호흡 배분, 배우들의 신체 연기를 담는 카메라까지 첫 장편치고 완성도가 안정적이다. 류승완이 조연출로 키운 감독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있다. 깊이 있는 인물 드라마나 메시지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여름 저녁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면, 이만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My Rating
엑시트
4.0
/ 5.0
재미
4.5
스토리
3.5
연기
4.0
영상미
4.0
OST
3.5
몰입도
4.5

스토리 3.5와 재미 4.5의 격차가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잘 쓴 이야기가 아니라 잘 달리는 영화다.

시청 주의
고소공포증 주의 세월호 연상 장면 포함
이 작품, 나한테 맞을까?
O  이런 분께 추천
  • 신파 없이 속도감 있게 달리는 여름 블록버스터를 찾는 분
  • 조정석의 코미디 연기를 좋아하고 그의 액션 버전이 궁금한 분
  • 슈퍼히어로가 아닌 소시민이 주인공인 재난 영화가 더 공감되는 분
  • 임윤아의 연기 변신이 궁금한 분 — 예상보다 훨씬 잘한다
X  이런 분은 패스
  • 재난 영화에서 설정의 개연성과 서사 밀도를 우선시하는 분
  •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 — 빌딩 외벽 클라이밍 장면이 상당히 많다
  • 인물 관계의 서브플롯이 제대로 마무리되기를 원하는 분
  • 조연 캐릭터들도 충분히 살아 있는 앙상블 영화를 기대하는 분
"
특수 요원 없이도 탈출할 수 있다, 클라이머 백수가 있으면
서사 깊이보다 속도와 쾌감을 원하는 분, 조정석의 에너지를 103분 내내 받고 싶은 분께
#소시민재난 #조정석 #임윤아 #신파없는블록버스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라이밍이 아니다. 용남이 의주에게 "야, 너 괜찮냐"고 묻는 그 짧은 순간이다. 103분을 달려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거기 있다.

재난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스펙터클이었나요 아니면 사람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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