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끓는 청춘 후기 — 1982 홍성, 박보영·이종석의 농촌 로맨스
"요즘 연애는 연애도 아니여~~!!" 한 줄로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포스터 카피는 흔치 않다. 부산이 〈바람〉을 냈다면, 충청도는 〈피끓는 청춘〉을 냈다. 1982년 홍성의 농고 복도에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엇갈린 연애사를 121분 러닝타임에 꾹꾹 눌러 담은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 안에 한국 지방 청춘 서사의 한 가지 원형을 숨겨 놓고 있다.
지금 보면 이게 정말 박보영·이종석·김영광·박정민이 한 교실에 있었던 영화라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2010년대 중반 한국 청춘스타들의 일종의 기념사진 같은 필모.
1982년 홍성, 네 명의 엇갈린 연애사
배경은 1982년 충청남도 홍성. 홍성농고 3학년 영숙(박보영)은 교내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 일진이다. 그러나 같은 학교 전설의 카사노바 중길(이종석) 앞에서만은 주먹이 풀리고 눈빛이 흔들린다. 영숙은 중길이 싸준 도시락에, 사준 운동화에, 심지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싸움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며 짝사랑을 이어 간다.
이 외로운 사랑의 판을 흔드는 건 두 명이다. 홍성공고 싸움짱 광식(김영광)은 영숙을 향해 제 나름의 방식으로 손을 뻗고, 서울에서 전학 온 소희(이세영)는 중길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중길과 소희의 연애, 광식의 질투, 그리고 그 모든 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결국 자기 몸을 던지는 영숙의 선택. 이렇게 네 개의 화살표가 어긋나게 꽂히는 동안, 1982년 농촌 고등학교의 운동장·교실·시장·극장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영화는 처음 30분 동안 "이건 그냥 가벼운 로코네"라고 관객을 안심시킨 뒤, 중반부터 결이 달라진다. 영숙이 중길을 지키기 위해 감행하는 한 번의 선택을 기점으로 톤이 내려앉고, 유머는 유지되지만 그 아래로 짠한 서늘함이 흐른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1982년 〈사관과 신사〉의 그 유명한 장면을 능청스럽게 오마주하며 관객의 눈가를 슬쩍 건드린다.
박보영의 변신과 충청도 사투리의 리듬
이 영화의 첫 번째 재미는 박보영이다. 〈과속스캔들〉 이후 '청순 국민 여동생' 이미지로 묶이던 그녀가 영숙의 얼굴을 하는 순간, 관객은 몇 초 안에 포지션을 바꾸어야 한다. 씩씩거리며 의자 위에 올라서서 1학년을 훑고, 목 뒤 솜털까지 세워 가며 노려보는 그 포스가 작은 체구에서 나오기에 오히려 더 우습고 귀엽다. 제31회 부일영화상 등에서 변신 연기에 대한 호평이 뒤따른 이유다.
두 번째 재미는 사투리와 공간의 리듬이다. 충청도 특유의 느린 종결어미와 능청스러운 억양이 대사 대부분에 깔리면서, 장르적 과장이 적당히 무마된다. "요즘 연애는 연애도 아니여"라는 한 줄만으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촬영지가 전북 순창 동계고등학교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을 만큼, 산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교사와 광천시장 일대의 낡은 간판들이 통째로 1982년의 한 장면처럼 눌러 앉는다. 2010년 이후 도시 재생과 간판 정비로 지금은 찍기 어려운 그림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록성으로도 작지 않은 값어치를 가진다. 권해효·김희원·라미란·박정민 같은 조연들의 1인 몫이 선명한 건 덤이다. 다만 이 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택한 방식은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로 들여다봐야 할 대목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며 더 선명해지는 불편함
가장 먼저 걸리는 건 '폭력의 결'이다. 여자 일진, 싸움짱, 그리고 짝사랑을 명분으로 한 남녀 간의 주먹다짐이 코미디의 재료로 소비되는 장면들이 꽤 있다. 특히 광식이 영숙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 중길이 다른 여학생들을 '게임'처럼 소비하는 설정은 2010년대 중반의 감수성에서도 이미 논쟁이 있었고, 지금은 더 둔중하게 걸린다. 영화가 후반부에 그 소비 방식의 대가를 분명히 치르게 하긴 하지만, 전반부의 웃음을 위한 대가로는 조금 헐겁다.
서사의 비중도 한쪽으로 쏠려 있다. 네 명의 사각관계를 표방하지만 결국 영화는 영숙-중길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광식과 소희는 그 축을 흔들기 위한 도구에 가깝게 쓰인다. 특히 소희 캐릭터의 반전(서울 출신 일진)은 설정만 던져 놓고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이세영의 존재감이 분량 대비 아쉽게 남는다. 명절 대목에 〈수상한 그녀〉와 맞붙으며 흥행에서 2위를 거둔 당시 성적도, 영화 자체의 한계라기보다는 이런 균형 문제가 관객의 입소문을 더 밀어 주지 못한 결과에 가깝다.
- 박보영의 '청순 이미지 깨기' 변신이 한국 영화사에 남을 만큼 선명하다
- 충청도 사투리 구사와 시골 고등학교의 공간감이 장르적 과장을 능청스럽게 눌러 준다
- 2010년 전후에야 가능했던 1982년 거리의 마지막 원형을 기록한 화면
- 권해효·김희원·라미란·박정민 등 조연진의 1인 1장면이 모두 살아 있다
- 〈사관과 신사〉 오마주 엔딩이 예상 외의 감정적 마침표를 찍어 준다
- 일진·짝사랑·주먹을 코미디 재료로 쓰는 방식이 현재 감수성에서는 둔중하게 걸린다
- 네 명의 사각관계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숙-중길 축에 쏠려 있다
- 소희 캐릭터의 반전 설정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흩어진다
- 중반 이후 톤 전환이 매끄럽다기보다는 다소 급하게 꺾인다
불편한 장면들도 분명히 있는데, 이상하게 영숙이 중길의 방문 앞에 운동화를 놓고 돌아서는 컷만큼은 몇 번을 봐도 마음이 움직인다. 영화란 게 원래 그런 식이다.
한국 지방 청춘물의 두꺼운 지층
〈피끓는 청춘〉은 걸작은 아니지만, 분명히 자기 자리가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자리는 한국 지방 청춘물이라는 두꺼운 지층 안에 있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바람〉이 90년대 말 남자 고등학생의 '폼 나고 싶은 바람'을 담담한 자전으로 풀었다면, 〈피끓는 청춘〉은 80년대 초 충청 여자 고등학생의 '지키고 싶은 사랑'을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으로 옮겨 쓴다. 한쪽은 조용하고 한쪽은 시끄럽지만, 둘 다 '진짜 있었던 공간과 진짜 쓰였던 말'을 바탕 삼아 지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묘하게 닮았다. 박보영의 작은 몸집에서 올라오는 한 방의 포스와, 정재일의 국악풍 OST가 깔리는 서면 뒷골목—결이 완전히 다른 두 이미지가 같은 계보 안에서 호흡을 나눠 쉬는 것이다.
지금의 잣대로 깎고 나서도 남는 게 있는 영화. 박보영의 얼굴 한 번, 충청도 사투리 한 줄, 농고 복도의 햇살 한 뼘—그 세 장면만 남아도 이 영화는 충분하다.
- O 박보영의 색다른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고 싶은 분
- O 80~90년대 한국 지방 학창시절의 공기를 좋아하는 분
- O 사투리 고증과 로컬 풍경이 중요한 관전 포인트인 분
- O 〈바람〉·〈써니〉 같은 청춘 회고 영화를 즐기는 분
- X 주먹과 짝사랑을 코미디로 묶는 설정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분
- X 현대적 로맨스의 건강한 관계 역학을 선호하는 분
- X 사각관계·짝사랑 구조 자체에 피로감이 있는 분
- X 복고풍 시대극의 느슨한 페이스를 참기 어려운 분
〈피끓는 청춘〉의 진짜 주인공은 박보영도 이종석도 아닌, 2010년 이후 다시는 찍을 수 없게 된 광천시장의 낡은 간판과 산에 둘러싸인 순창의 어느 교사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미지를 붙들어 두는 가장 오래된 수단이고, 이 영화는 그 기능만으로도 자기 몫을 했다.
1982년의 충청도와 1999년의 부산 — 당신의 학창시절 풍경은 어느 쪽 결에 더 가까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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