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리뷰 — 박찬욱 감독의 20년 숙원, 청룡 7관왕의 블랙 코미디
"어쩔수가없다"는 2025년 9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12번째 장편 영화로, 영어 제목은 "No Other Choice"입니다.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가 갑작스런 해고 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인데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에 이어 청룡영화상 7관왕, 골든글로브 3개 부문 후보까지 — 박찬욱 감독이 20년간 품어온 숙원 프로젝트가 드디어 빛을 봤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시청 가능합니다.
줄거리 — 해고된 가장의 처절한 재취업 전쟁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만수(이병헌). 25년간 다닌 태양제지에서 제지 전문가로 일하며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1년이 넘도록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죠.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합니다.
그 자리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격이라고 확신한 만수는 모종의 결심을 합니다. 가짜 구인광고를 내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수집하고,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것. 그렇게 소시민의 가여운 발광이 시작됩니다.
박찬욱 감독의 20년 숙원, 드디어 완성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미는 박찬욱 감독이 20년간 품어온 프로젝트라는 점입니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리메이크를 발표했고, 2017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영어 영화로 제작하려 했지만 투자가 무산됐어요. 결국 한국 영화로 돌아와 완성했는데, 감독 본인이 "일생의 프로젝트"라고 부를 만큼 각별한 작품입니다.
원작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The Ax)'로, 2005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프랑스어 영화로 먼저 만든 바 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이번 작품은 한국-프랑스 합작으로 제작됐어요. 흥미로운 건 원래 제목 후보가 '모가지'와 '도끼'였다는 것. 너무 잔인한 이미지라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사는 마음"을 담아 '어쩔수가없다'로 정했다고 합니다.
정서경 작가가 22년 만에 불참한 것도 화제였는데요. '친절한 금자씨'부터 6편을 함께한 파트너십이 끊긴 건 아쉽지만, 이경미·이자혜 작가와의 새로운 협업이 신선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병헌이라서 가능했던 연기
이 영화의 최대 무기는 단연 이병헌입니다. 절박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만수의 가여운 긴장감을 슬프면서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냈어요. BBC는 그의 연기를 "능숙한 불운 연기"라고 평가했고, 버라이어티는 "얼굴 모든 부분에 캐릭터를 담아냈다"고 극찬했습니다.
손예진도 7년 만의 영화 복귀작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어요. 박찬욱 감독이 "이병헌보다 훨씬 어려운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복잡한 캐릭터인 미리를 입체적으로 소화해냈고,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으로 보답받았습니다. 17년 만의 두 번째 청룡 여우주연상이에요.
이성민, 박희순, 염혜란, 차승원까지 — 조연진의 앙상블도 탄탄합니다. 특히 이성민이 연기한 구범모는 만수의 재취업 경쟁자이자 제거 대상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인데, 그 미묘한 위치를 깊이 있게 표현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쉬운 점 — 평론가와 관객의 온도 차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사람을 심하게 가립니다. 로튼토마토 100%라는 평론가 점수와 달리, 개봉 직후 한국 관객 사이에선 호불호가 크게 갈렸어요. 네이버 실관람객 평점이 6점대를 기록하기도 했고, CGV 에그지수는 84%에 머물렀습니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건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만수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이 납득이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요. 물론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개연성을 엄격하게 따지긴 어렵지만, 관객마다 받아들이는 폭이 다른 것 같습니다.
후반부 전개가 늘어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38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긴장감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간이 존재하고,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도 있어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처럼 미장센과 디테일은 훌륭하지만, 그게 모든 관객에게 통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 박찬욱 감독 특유의 정교한 연출과 미장센
- 이병헌의 압도적 연기력, 절박함과 유머의 공존
- 자본주의와 실직 문제에 대한 신랄한 풍자
- 손예진·이성민 등 조연진의 탄탄한 앙상블
- 조영욱 음악과 조상경 의상의 완벽한 조화
- 주인공 살인 동기에 대한 감정이입이 어려움
- 138분 러닝타임, 후반부 전개가 늘어지는 구간
-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 기대에 못 미침
- 평론가와 일반 관객 평가의 큰 온도 차
- 블랙 코미디 장르 자체에 대한 호불호
기생충과 비교 — 또 하나의 한국 걸작인가
해외 매체들이 이 영화를 '기생충'과 비교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BBC는 "황홀하게 재미있는 한국의 걸작, 올해의 기생충"이라고 평가했고, 로튼토마토 점수도 기생충(99%)을 넘어섰어요. 둘 다 계급 갈등과 자본주의를 다루지만, 접근 방식은 꽤 다릅니다.
기생충이 가족 대 가족의 계급 침투를 다뤘다면, 어쩔수가없다는 개인의 생존 투쟁에 집중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계단이라는 수직적 상징을 통해 계급을 표현했다면, 박찬욱 감독은 도끼(해고)와 종이(제지업)라는 수평적 메타포로 구조조정의 잔혹함을 보여줘요. 감독 본인도 "헤어질 결심이 시라면, 본작은 산문"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결국 취향의 문제입니다. 기생충의 긴장감과 반전을 좋아했다면 이 영화는 다소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고, 박찬욱 특유의 유려한 스타일링과 블랙 유머를 좋아한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거예요.
총평
박찬욱 감독의 20년 숙원을 담은 역작이지만, 모든 관객을 만족시키기엔 다소 까다로운 작품입니다. 이병헌의 연기와 박찬욱의 미장센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하지만,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내성이 필요해요. 처음 볼 때는 단순하고 코믹하지만, 되풀이해 볼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영화 —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에게도 걸작이 될 겁니다.
그가 도끼를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병헌의 연기를 즐길 준비가 된 분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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