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사랑의 연인 리뷰 — 탈린영화제 그랑프리, 전쟁 속 청각장애 연인의 불가능한 사랑
2024년 탈린국제영화제(PÖFF)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 있다. 에스토니아-세르비아 합작 영화 깊은 사랑의 연인(에스토니아어 원제: Kurdid armastajad, 영어: Deaf Lovers)이다. 러시아 출신 망명 감독 보리스 구츠(Boris Guts)가 연출한 이 영화는 러-우 전쟁이 한창인 2022년, 이스탄불에서 우연히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과 러시아 남성의 사랑을 다룬다. 단순한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이 모두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이 전쟁과 사랑, 침묵에 관한 묵직한 은유로 작동한다.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서 그랑프리와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지만, 그 이전에 우크라이나 정부 기관들의 조직적 상영 반대 요청과 논란 속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이스탄불, 전쟁을 듣지 못하는 두 사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해. 이스탄불 어딘가에 두 사람이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 소냐(아나스타시아 셰먀키나)와 러시아 출신 다냐(다닐 가지줄린). 둘 다 낯선 도시에서 돈이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리고 둘 다 청각장애인이다.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젊은이들이 으레 하는 일들을 한다. 함께 떠돌고, 파티를 하고, 서로에게 끌린다.
문제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소냐는 우크라이나에서 왔고, 다냐는 러시아에서 왔다. 전쟁은 귀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기억 속에, 몸속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전쟁은 이미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다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의 논리를 반복한다. 소냐는 결국 그를 떠난다. 마지막 대사는 수어로 전달된다. "어쩌면 100년 후에는 가능할지도."
이 영화는 로맨스처럼 시작해서 반전(反戰) 우화로 끝난다. 분위기로는 가스파르 노에 초기작을 연상시키는 도시 방랑자들의 질감에 얀 리히터 같은 미니멀 사운드스케이프가 겹쳐진다. 서사보다 감각이 앞서고,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유럽 페스티벌 계열의 관객이라면 비교적 익숙한 어법이지만, 이 영화만의 정치적 무게감은 분명히 다른 층위에 있다.
장점 — 은유가 살아 숨쉬는 영화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자산은 '청각장애'라는 설정이 단순한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포탄 소리도, 사이렌도, 애국가도 들을 수 없다. 두 사람이 이스탄불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감독 보리스 구츠는 이 설정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그는 청각장애가 전쟁으로부터의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냉정하게 증명한다. 전쟁의 폭력은 소리가 아니라 관계 속에, 권력 구조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운드 디자인은 이 영화의 숨겨진 걸작이다. 탈린국제영화제 현지 리뷰어들이 만장일치로 주목한 부분이기도 하다. 청각장애인의 시점에서 세계가 어떻게 들리는지를 표현한 음향 설계는 정밀하게 짜여 있으면서도 결코 작위적이지 않다. 진동, 왜곡, 고요 — 소리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서사를 움직이는 도구로 기능한다. 음악과 음향을 동시에 담당한 테오 타오와 일리아 마슬렌니코프의 작업은 저예산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초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조건을 감안하면 이스탄불을 담아낸 촬영 역시 놀랍다. 촬영감독 다리아 리하초바는 관광지 이미지가 아닌 도시 가장자리의 질감, 불안하고 뜨겁고 이질적인 이스탄불을 포착한다. 두 주인공이 표류하는 배경은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 위에 있는 도시 이스탄불이어야만 했다.
아쉬운 점
영화의 개념적 완성도에 비해 서사적 완결감은 다소 아쉽다.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균열되는지, 다냐의 폭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보니, 일부 장면은 '모호함'과 '불충분함' 사이에서 갈등한다. 가스파르 노에식의 도발적 장면들은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완성도 측면에서 고르지 않다. 논란이 된 장면들이 영화의 본론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주의를 분산시키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 또한 수어가 중심 언어로 기능하는 영화임에도 자막 이외의 번역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있었으면 어떨까 싶다.
- '청각장애'를 전쟁과 사랑에 대한 이중 은유로 정밀하게 구조화한 시나리오
- 탈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전원이 주목한 독창적 사운드 디자인
- 이스탄불의 주변부를 날카롭게 포착한 촬영 — 저예산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러시아 방명 감독이 자기 돈으로 찍어낸 명확한 반전(反戰) 메시지
- 영화 자체보다 논란이 더 유명해지는 아이러니 — 작품 외적 맥락도 볼거리
- 인물 내면의 균열 과정이 불충분하게 서술되어 서사적 납득감이 약하다
- 일부 도발적 장면이 본론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집중을 흩뜨린다
- 국내 스트리밍 미제공 — 공식 경로 시청이 매우 제한적
- 실험영화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다
총평
재미 점수(6.5)는 이 영화의 결함이 아니라 선택이다. 깊은 사랑의 연인은 처음부터 오락을 목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관객의 불편함 위에 올라서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 질문의 날카로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영화제 그랑프리라는 훈장이 모든 관객에게 동등한 경험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솔직히 적어둔다.
청각장애는 면죄부가 아니다 — 전쟁을 침묵으로 은폐하려는 욕망에 대한 반론
이 영화가 건드리는 가장 불편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전쟁 중에 적국 출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 가능성을 바라는 욕망 자체가 누구의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전쟁을 귀로 듣지 못하는 두 사람이 이스탄불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판타지는, 현실에서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권적 무감각에 가깝다. 보리스 구츠는 그 낭만적 가능성을 처음에 허용하고, 그것이 환상임을 영화 말미에 냉정하게 박살낸다.
우크라이나 정부 기관들이 이 영화를 "탈진실적 방법론"이라며 반대한 데는 일말의 이유가 있다.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연인 서사를 다루는 것은 양측의 고통을 대칭적으로 배치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대칭을 무너뜨린다. 다냐는 소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소냐는 그를 떠난다. 영화의 최종 결론은 명확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의 사랑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불가능함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 있다. 이 영화가 반러·반전 작품임에도 양쪽 모두에게 미움받은 것은, 논쟁이 영화를 보지 않고 벌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어느 진영에도 완전한 위안을 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리스 구츠가 PÖFF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침략자인가"라는 질문에 "다른 선택지가 있나요?"라고 되물은 장면은 영화 자체보다 더 강렬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다. "100년 후에는 어쩌면." 그 말의 무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 또는 페스티벌 영화 팬
- 러-우 전쟁의 문화적·예술적 해석에 관심 있는 분
- 사운드 디자인과 촬영 언어에 민감한 시네필
-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원하는 분
- 뚜렷한 서사와 결말의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분
- 성적 폭력 묘사에 민감한 분
- 국내 스트리밍으로 간편하게 찾아보고 싶은 분 (현재 미제공)
- 정치적으로 균형 잡힌 서술을 기대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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