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후기 — 태어난 죄를 묻는 열두 살의 법정
열두 살짜리 아이가 법정에 선다. 죄명은 살인미수가 아니다. 그가 진짜 묻고 싶은 건 하나다. "왜 나를 낳았습니까?" 가버나움은 이 질문 하나를 126분에 걸쳐 증거로 제출하는 영화이며, 그 증거의 무게가 칸 영화제 관객석을 15분간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 '배우'는 없다. 자인 알 라피아는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한 번 살았다. 그래서 이 영화 앞에서 '연기력'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진다.
출생 기록 없는 아이, 법정에 서다
베이루트의 빈민가. 자인은 부모에게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다. 학교는커녕 나이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 거리에서 가짜 처방전으로 트라마돌을 타 와 주스로 속여 파는 게 일과다. 형제자매는 셀 수 없이 많고, 집이라 부르는 공간은 온 가족이 바닥에 뒤엉켜 자는 방 하나다.
자인이 유일하게 지키려 했던 건 여동생 사하르였다. 초경이 시작된 사하르가 집주인 아사드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지자 자인은 집을 뛰쳐나온다. 거리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이주 노동자 라힐과 그녀의 아기 요나스를 만나 잠시 가족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라힐이 체포되면서 자인은 젖먹이 아기를 혼자 떠안게 된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법정 회상 형식으로 풀어내며,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는 이유를 한 장면씩 증거로 제출한다.
시청 체감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숨을 쉬게 해주지 않는다. 한 번의 위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위기가 겹치고, 관객은 자인과 함께 베이루트의 골목을 숨 가쁘게 뛰어다니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걸작이 나왔다
이 영화의 가장 압도적인 성취는 리얼리즘의 밀도다. 출연진 전원이 비직업 배우이며, 대부분 자신의 실제 삶과 닮은 역할을 맡았다. 감독 나딘 라바키는 대본 대신 상황만 제시하고 배우들이 자기 말로 대화하게 했다. 총 촬영 분량 520시간 중 126분을 추려낸 결과물은 사실상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자인의 어깨 높이에서 베이루트의 골목, 시장, 불법 거주지를 따라다니며 만들어내는 질감은 어떤 세트에서도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자인 알 라피아의 존재감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열두 살 아이의 몸에 담긴 분노, 체념, 그리고 아기 요나스를 돌볼 때 불현듯 드러나는 부드러움까지, 이것을 '연기'라고 부르기엔 너무 날것이다. 칸에서 15분 기립박수를 이끌어낸 건 감독의 연출이 아니라 이 아이의 눈빛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강력한 리얼리즘 안에서도, 영화가 선택한 일부 구조적 장치는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감정의 포격이 쉴 틈을 주지 않을 때
가버나움에 대한 비판은 주로 '고통의 과잉'에 집중된다. 영화가 자인의 비참함을 법정 증거처럼 쌓아 올리는 구조는 강력하지만, 고난이 끊임없이 에스컬레이션되는 형식이 일부 관객과 평론가에게는 감정 조작으로 읽힐 수 있다. 또한 법정 장면의 프레이밍이 다소 도식적이고, 결말의 감정적 해소가 126분 동안 쌓인 현실의 무게에 비해 너무 깔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 영화를 '빈곤 포르노'라 부르는 시선이 존재하는 이유다. 다만 그 비판조차,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 전원 비직업 배우로 구현한, 연기와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압도적 리얼리즘
- 자인 알 라피아의 존재 자체가 만들어내는 스크린 장악력
- 아동 인권, 난민, 조혼, 불법체류 등 복합적 사회 이슈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구성력
- 520시간 촬영분에서 추출한 핸드헬드 다큐멘터리 질감의 몰입적 영상
- 고난의 에스컬레이션이 쉼 없이 이어져 감정 조작으로 읽힐 수 있는 구간
- 법정 프레이밍이 네오리얼리즘의 톤과 다소 충돌하는 도식적 구조
- 결말의 감정적 해소가 126분의 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인상
비평가가 말하는 '감정 조작'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런데 자인이 법정에서 "나를 낳지 말았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조작인지 현실인지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증거 채택이 끝난 뒤, 남는 것
가버나움은 편안한 영화가 아니다. 두 시간 동안 관객을 베이루트의 빈민가에 데려다 놓고, 그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가 '최고의 아랍어 영화'라는 흥행 기록을 세우고, 중국에서만 5,4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은 보편적 감정에 닿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태어났든 아이는 아이이고, 세상은 그 아이에게 빚이 있다는 단순한 명제를 이토록 뼈저리게 전달한 영화는 드물다. 감정적 소진을 감수할 각오가 있다면, 2018년 세계 영화의 가장 강렬한 증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점수를 매기는 손이 망설여졌다. 이 영화에 숫자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자인에게 실례인 것 같아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묻는 존재의 조건
가버나움이라는 제목은 프랑스어에서 '혼돈'을 뜻하며, 성경에서 기적을 목격하고도 회개하지 않아 저주받은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딘 라바키는 이 이중적 의미를 현대 레바논에 그대로 대입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디즈니월드가 아니라 종교의 성지) 바로 옆에서, 기적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혼돈 속에 산다는 구조적 아이러니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그러나 가버나움이 더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순히 빈곤을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빈곤 속에서 아이를 낳는 행위' 자체에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는 학대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게 한 것' 자체 때문이다. 이 전제는 감독이 2년간 레바논 거리의 아이들을 인터뷰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이 문장을 법적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개인의 비극을 시스템의 실패로 확장시킨다.
출연진 전원이 극중 역할과 동일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놓는다. 촬영 중 실제로 체포된 배우, 촬영 후 노르웨이로 재정착한 주인공 자인, 가버나움 재단을 통해 계속되는 제작진의 지원은 영화가 스크린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감정 조작이라면, 현실 자체가 조작이다.
-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의 극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 아동 인권, 난민, 빈곤 문제에 관심 있는 분
- 비직업 배우가 만들어내는 날것의 연기에 몰입하시는 분
- 강렬한 감정적 체험을 영화에서 기대하시는 분
- 아동이 고통받는 장면을 보기 힘드신 분
-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영화를 피하고 싶으신 분
- 희망적 결말이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시는 분
- 현재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신 분
영화가 끝나고 자인의 여권 사진이 화면에 뜬다. 처음으로 웃고 있는 그 얼굴이, 126분 동안 흘린 눈물보다 더 아프다.
자인의 질문에 당신은 어떤 답을 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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